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릭 홉스봄 (문단 편집) == 소개 == [[영국]]의 [[역사학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로서, E. P. 톰슨으로 대표되는 [[영국]] [[신좌파]]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영국사 연구들에 치중한 반면 세계 전체의 역사를 전체사적인 관점에서 잘 서술했다는 평을 듣는다.[* 다만 198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이 등장하면서부터 이런 전체사적인 관점 자체가 비판받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홉스봄 본인의 자서전인 <미완의 시대>를 보면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에 대해서 역사라는 담론 자체를 좀먹는 스탠스라는 비판을 하고 있다.] 그의 인생이 곧 20세기 역사라고 할만큼 현실정치, 사회문제에도 많이 참여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생으로, 소년기에는 외가가 있는 오스트리아의 빈과 독일의 베를린에서 살았다.[* 외가가 오스트리아 쪽에서 대규모 보석상을 운영했다고 한다. 다만 이건 홉스봄이 태어나기 전의 일로 1차대전 패전과 인플레이션으로 집안이 그대로 몰락했다고 한다. 홉스봄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홉스봄의 유년시절에는 난방할 돈도 없어 집이 얼음장이었고, 신발을 새로 살 돈도 없어서 겨울에 길을 가다가 헤진 신발 탓에 너무 발이 시려서 펑펑 울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독일에 있을때 [[히틀러]]의 수상 취임을 알리는 신문 호외(1933년 1월 30일)를 직접 보았다고 한다. 홉스봄이 유대인 혈통(친가는 폴란드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출신이었고, 외가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계였다.)이란 걸 고려해보면… 다만 홉스봄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독일에서 보내던 학창시절 동안 독일인들이 자기를 바라보던 인식은 영국인이었지 유대인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뒤에 나오다시피 히틀러 집권 후 그는 곧 영국으로 이주한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것도 이 시기의 일. ~~15살에 자생적 공산주의자가 되다니 흠좀무~~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삼촌을 따라 영국으로 이주,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케임브리지 대학 학부생 시절부터 박학다식한 걸로 유명했다고 한다. 다만 그와 동시에 무례하다는 평가도 유명했던 듯(...) 이 시기에 동문수학한 사람 중에 하나가 [[앨런 튜링]]. 홉스봄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왠 이상하게 생긴 애 하나가 맨날 조깅을 했는데 알고보니까 천재더라(...)'] [[영국 공산당]]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56년]] [[소련]]이 [[헝가리 혁명]]에 개입한 것을 비판했고, 탈 스탈린 운동을 지지했다. 그러나 영국 공산당을 탈당한 동료들(대표적으로 E.P 톰슨)과 달리 홉스봄은 공산당에 잔류하여 해산 시까지 당원으로 남았다. 이는 두고두고 홉스봄의 인생에서 낙인처럼 남았는데, 홉스봄 본인은 이와 관련하여 >영국에서 책만 보고 공산주의자가 된 자들과 달리 나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바로 그 현장에서 [[나치당|파시즘]]이 집권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 그리고 그 좌절감은 나에게 평생 마르크스주의에 매달릴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굉장히 유연한 면모도 있어서, 1970~80년대 [[영국 노동당]]의 좌경화를 비판했고,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 노선(정확히는 노동당 현대화)을 초기에는 호의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블레어가 신자유주의 노선을 강화하자 강력히 비판했다. 그야말로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인데, 역설적이게도 그의 삶은 전형적인 중산층.[* 당장 그가 동구권 정치 지도자들과 담소를 나눈 곳은 런던의 고급 호텔이었으며, 제3세계에 관한 그의 연구 활동을 지원한 게 [[록펠러 재단]]이었다.] ~~애초에 [[엥겔스]]도 공장주 아들이었는데 뭘...~~ 이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부정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실제로 동구권의 한 지식인은 "그래서 우리가 권위주의 공산 독재 정권이랑 목숨 걸고 싸울 동안 너님이 희생한게 뭔데? 기껏해야 케임브리지 정교수 못 먹은 거 아님?"이라고 대차게 까기도 했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스탈린의 공업화 정책으로 수백만명이 목숨을 잃은 것을 당대에 알았더라도 공산정권이 정당하다고 믿겠는가?"라는 질문에 'ㅇㅇ'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공산당 당적 때문에 냉전 시기 내내 [[MI5]]에게 사찰당했으며, 교수 임용도 늦춰져 [[1947년]]부터 [[1970년]]까지 버크벡 대학(칼리지)에서 [[강사]]와 [[조교수]]를 거쳤다. 다만 영국의 경우 전임 교수의 개념이 확실히 구분되어있고, 소위 테뉴어가 그만큼 빡세다. 사실 홉스봄 본인이 2차 대전 동안 6년간 군복무를 하는 바람에[* 유창한 독일어때문에 처음엔 [[에니그마]] 해독팀에 추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외가가 오스트리아계이며 정치적으로 공산주의 성향이라는 탓에 짤렸다고 전해진다.] 박사 학위 취득이 많이 늦어져서 학위를 [[1950년]]에야 따기도 했고. 위에 절취선 농담에도 쳐져있지만 사실 실질적으로 외국인+유대인이란 배경상의 불이익도 있었고, EP톰슨이나 크리스토퍼 힐 같은 세대 비슷한 영국 공산당 역사학자 그룹 (Communist Party Historians' Group) 소속 동료들에 비하면 막상 2차대전 전에는 망명객으로서 재정착 과정에 정치 활동에 더 집중하느라 학계에 들어가는 타이밍도 한템포 늦었다. 의외로 공산주의 성향은 크게 심각하게 문제가 되지 않았는게, 전반적으로 봐도 당시 영국은 이베리아 반도 독재정을 제외한 다른 서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론 확실한 반공 서방 진영에 속해도 내부 민간 사회, 특히 문화계, 학계에선 좌익의 영향력이 용인될 뿐만 아니라 영향력도 강했다.[* 동시대 미국 [[매카시즘]]에 비교한 홉스봄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영국에서는 (공산주의자 교수들은) 한 10년동안 승진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학교에서 쫒아내진 않았다."] 게다가 홉스봄이 처음 자리 잡은 직장인 런던대학교 버크벡 칼리지도 영국 학계 기득권의 끝판왕격인 옥스브릿지의 보수적 학풍에 반대하던 곳이라 진보, 좌파적 학자들에게도 상당히 너그러운 편이였다. 정치적 사정 그 자체보단 저런 개인적 배경 문제와 아웃사이더 성향으로 인해 홉스봄은 다른 영국 공산당 역사학자들이 전후 학계에서 승승장구할동안 정식으로 테뉴어 받는거나 명성을 얻는거나 상당히 늦었다가 70년대 중후반에 돼서야 학계와 대중 양쪽에서 학자로서 성과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대기만성형 학자였던 셈이고, 본인 회고록 등에서도 50-60년대는 아웃사이더이자 비주류로서 받은 은근한 모멸감 등에 꽤 한을 품고 살다 뒤늦게 온 명성과 성공에 만족했다는 어조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